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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요약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는 내용으로 가득 찬 책이 바로 학개서입니다. 분명하게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학개에게 언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까? 다리오 왕 제 2년입니다. 스가랴와 비슷한 시기죠. 왜 하나님이 비슷한 시기에 두 명의 선지자에게 임하셨을까요? 저는 이야말로 하나님의 정확한 뜻을 전하시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학개에게만 임했다면, 혹은 스가랴에게만 임했다면, 만약 그랬다면 제가 당시 사람이라면 믿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추측은 학개와 스가랴에게 동시에 같은 말씀을 주심으로써 참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 공사를 재개하는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셨다 싶습니다.   학개를 통해 당시의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주십니까? 4절입니다 당시에 집은 흙으로 지었습니다. 판벽은 나무판으로 벽을 삼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더 비싸고 좋은 집을 의미합니다. 솔로몬 시대에 지었던 성전은 황폐화가 되었고, 재건되지 못한 채 16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포로기 사람들은 페르시아 왕국에, 그리고 돌아온 사람들도 고향에 잘 안착한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집과 백성들의 집을 비교하시며, 이들의 잘못을 깨우치고 계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성전과 같은 건물에 머무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왜 하나님은 건물을 비교하십니까?   하나님은 건물에 갇히시는 분이 아니신데, 사람은 건물에 시선이 갇힙니다. 그래서 인간의 시선에 맞추어 그분의 뜻을 밝히시고자 성전과 그들의 집을 대조하십니다.   진정한 뜻은 성전의 유무가 아니라 백성들의 중심입니다. 이 비유를 하시면서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 예배함에 있는지 아니면 자신의 안위와 안락함에 있는지를...
onwoori 09:05 추천 0 조회 1
우리는 역사 속 지금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삶의 하루 하루가 모여 시대의 역사가 됩니다. 인생 속에서의 선택이 역사가 됩니다. 우리가 만난 한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기회와 무지 속에서 만남과 사건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본문의 시작에서는 히브리어로 ‘그리고’를 의미하는 ‘와우’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그리고’라는 것은 에스라 앞에 어떤 책과 연결해서 썼다는 것이죠. 어떤 쪽으로 묶였던지 에스라는 분명 포로 이전의, 이후의 언약 공동체의 역사를 이 이야기를 통해 연결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게 역사의 사건 사건이 연결되어진 상황 속에서 고레스가 갑자기 조서를 내립니다. 고레스가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며 유다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라 하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라 이야기합니다.   고레스는 바사 왕국의 왕입니다. 그런데 일개 정복당한 민족의 신을 신앙고백을 하며 섬긴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가 있을까요?   여러분들 옆에 있는 이 사람이 갑자기 하나님께서 마음 부어주시고 은혜 주셔서 어떤 일을 일으킬지 모르는 겁니다. 역사 속의 한 사람으로 나와 내 옆에 있는 귀한 영혼과 우리 공동체가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고레스가 성전 기물로 삼고자 꺼낸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원래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용되었던 성전 그릇을 꺼내줍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유물들이 외국에 있습니다. 전리품은 자국의 힘을 상징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용되던 성전 그릇은 전리품입니다. 그것을 예루살렘...
onwoori 2024.05.12 추천 0 조회 4
경수초등학교가 마지막 어린이날을 맞이하였다고 합니다. 내년 3월에는 경일초등학교와 통폐합이 됩니다. 어린이날이 학교에서만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학교가 사라집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어떻게 이 문제를 대처해야 할까요.   주일학교마다 어린이를 위한 행사를 잘 준비하였습니다. 어린이라는 시절은 금새 왔다가 스쳐 지나가죠.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린이주일 행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어린이를 위하여 한번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주 사랑으로 안아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행사는 아이들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사랑의 표현이 아이들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어린이들을 보시면 꼭 안아주시면서 너는 우리 교회의 미래란다 축복한다고 말씀하기 바랍니다.   본격적으로 스가랴서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장세훈 박사에 따르면, 스가랴서 전체의 요약분이 바로 오늘 본문 1장 1-6절이라고 합니다. 이 부분만 알아도 스가랴서 전체의 이야기를 알 수 있습니다.   1절에 다리오왕이 즉위한 지 2년 째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이자 베레갸의 아들인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였다고 나옵니다.   스가랴에게 따라다니던 말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잇도의 손자 스가랴 라는 말입니다. 잇도라는 사람이 당시 선지자들이나 믿음의 사람들에게 굉장히 존경받는 사람이었던 겁니다. 족보를 왜 탐독하며 연구했느냐. 어린이주일. 우리가 다시 한번 강조하고 또 기억해야 하는 것은, 믿음의 명문 가문을 이루어야 하는 존재가 이 자리에 있는 우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 우리 주일학교 아이들 가운데 스가랴와 같은 사람들이 나오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열심을 내는 것도 기억하시지만,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도 반드시...
onwoori 2024.05.05 추천 0 조회 3
최근 제가 와우리교회 부설 우리기독학교의 교장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교육을 하실 때에 학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다니엘과 같은 아이들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시더라구요.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세상 속에서 믿음을 지켜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교육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니엘과 같은 믿음.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믿음입니다. 본문과는 관련이 없지만 기독교 교육에 관하여 조금 더 마음을 나누고자 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사회화에 대해서 가장 중요한 기관이 어디입니까? 원래는 가정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가정이 아니라 공교육입니다. 공교육은 돈을 내지 않습니다. 국가에서도 다음 세대에는 끊임없이 투자합니다. 그렇게 공교육을 거쳐 가며 한 아이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필요한 지식과 관계를 쌓아갑니다.   우리가 다니엘과 같은 믿음을 가진 하나님 나라의 국민을 세우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다음 세대에 투자해야 합니다. 교육은 백년대계라 했습니다.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지만, 끊임없이 길러내야 다니엘과 같은 믿음을 가진 하나님 나라 백성이 나오는 겁니다.   저랑 여러 가지 신앙의 문제를 놓고 대화를 나누는 기독교교육 교수님이 계십니다. 그 교수님이 1/140을 말씀하시더라구요.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장년이 되었을 때에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확률이라고 합니다. 제가 고등학생 시절, 제 아내와 저는 같은 교회 같은 고등부였습니다. 그때 고등부가 약 160명 정도 되었어요. 그런데 지금 교회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10명도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문제 제기를 해야 합니다. 여러 교회를 다니고 섬기고, 분석하면서 특징이 있었습니다. 다음 세대가...
onwoori 2024.04.28 추천 0 조회 5
오늘 본문에 벨사살 왕이 나옵니다. 기록에 따르면 벨사살은 왕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왕은 나보니두스였습니다. 왜 왕이라고 부르냐면, 나보니두스 왕은 통치기간의 대부분은 아라비아 지역에서 보냈고 벨사살을 바벨론의 섭정으로 세웠습니다. 실질적인 왕의 역할을 했던 사람이 벨사살이었습니다.   벨사살은 귀족 천명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천명 앞에서 술을 마셨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그의 귀족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벨사살에게 동조하는 가신들의 모임입니다. 쾌락에 사로잡힌 시간이었을 것이고, 이성이 마비된 상태였을 겁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벨사살 왕이 잔치를 베풀 때에 사용한 그릇들은 어느 나라에서 탈취한 것들이었습니까? 2절에 보면, 벨사살은 아버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하여 온 금, 은, 그릇이었습니다. 성전에서 탈취해 온 성전 기물로 왕과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게 하려 하였다는 것은 의도가 있는 행동입니다. 성전 기물은 신에게 드리는 것들이 담기는 그릇과 잔입니다.   성전 기물로 담긴 음식으로 내 부하들이 먹는다면, 내 부하들이 신급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부하들이 벨사살에게 충성을 다합니다. 즉 벨사살의 의도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욕할 의도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은 의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악인들의 그 마음,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벨사살의 행동, 마음, 다 알고 계십니다.   5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여기에서 보면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났다고 나옵니다. 지금 이 손가락들이 나타났던 상황은 우상을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었다며 찬양하고...
onwoori 2024.04.20 추천 0 조회 5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이라는 이 주제는 다니엘서 3장 전체에서 핵심적인 문장입니다. 구약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아마도 이 신상은 바빌로니아 제국, 바빌로니아 정신을 형성화하여 황제 느부갓네살을 본 따 만든 신상이었을 것입니다. 이 신상에 절한다는 것은 바빌로니아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것이죠.   국가의 신성한 이데올로기를 채택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정치적 통일성을 만들어 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신들에 대한 예배를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바빌로니아의 국가 신들을 우선시한다면 이라는 전제조건을 달아 놓았습니다. 그렇게 느부갓네살 왕은 공식적 국가 종교 정책에 합당한 신상을 만들고 축제를 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나아와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유다인들은 그들의 축제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본 갈대아인들은 그 지역 사람들입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저들만 절하지 않았다. 축제에 참여하지 않았다며 그들을 참소, 고발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닥친 예상하지 못한 위기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 1부에 나누었지만, 왕의 식탁에서 내려오는 고기와 관련하여 이미 이런 위기상황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때에 그들은 바빌로니아의 전적인 충성 정책에 대하여 양심적이고 종교적인 반대를 선언했습니다. 그들은 일정한 수준의 종교적 자유를 누렸으며, 황제도 그것에 대한 어떤 위협이나 징계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13절에,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오라 말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라고 나옵니다. 느부갓네살은 이들을 많이 아꼈던 것 같습니다. 14절에, 이것이 사실이냐 묻습니다. 그리고 15절에, 이제라도 절하라고 말합니다. 절하지 않으면...
onwoori 2024.04.14 추천 0 조회 7
요즘 저의 아들이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왕할머니 어디가셨어? 응 왕할머니는 하나님이 부르셔서 하늘 놀이터에서 놀고 계셔. 하늘 놀이터 하율이는 가고 싶어? 아니 가면 엄마 아빠 못보잖아. 그게 죽는 거야? 응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부르시면 죽어서 하늘 놀이터에 가게 돼. 아빠도 엄마도 죽어? 당연하지 그래서 하나님 잘 믿어야 나중에 하늘 놀이터 가는 거야.   이 대화 끝에 하율이가 요즘 교회를 더 잘 나옵니다. 전에는 하나님 집에서 아빠가 일하느라 집 안 온다고 하나님이 아빠를 뺏어간다고 그러더니 요즘에는 하나님 집에 자주 가서 하나님하고 친해져야 한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 이런 거구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를 가르쳐주셨던 한 철학 전공 교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오늘을 살아가면서 의미를 찾는다.”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면 오늘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려 합니다.   나이가 어리든 많든 인간이라면, 죽음을 앞에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영생을 생각할 수 있고, 선물로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 뒤에 부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죽음과 생명은 함께 가는 신앙의 신비인 듯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니엘에게 닥친 상황은 어떤 상황입니까. 가히 죽음의 상황이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주전 605년에 느부갓네살은 이집트 원정 중에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성전 보물들을 취하고 유다의 몇몇 귀족들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갑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잡혀간 망한...
onwoori 2024.04.07 추천 0 조회 3
오늘 본문은 지난 성찬식 본문과 동일합니다. 성찬식 때에 다른 본문으로 설교하고 성찬 본문을 설교하는 것보다 성찬식 때마다 성찬식 본문으로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성찬의 의미를 강화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매년 같은 본문으로 성찬의 의미를 강조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 도리를 말씀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균형 잡힌 분이십니다. 자유로운 것 같고, 규례와 절차를 지키기 원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이는 예수님께서도 꼭 지켜 행하라고 명령하신 예식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세례이고, 다른 한 가지는 성찬입니다.   세례는 마태복음 28장 19절에 말씀하셨죠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그리고 성찬은 오늘 본문 19절에,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두 번 정확하게 명령하시며 예식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참된 교회의 세 가지 구별 기준은 무엇일까요? 참된 교회는 쉽게 말하면 내가 원하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겠죠.   신학적으로 참된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 하면, 첫 번째로 말씀이 바르게 설교되고 있는가입니다. 쉽게 말하면 성경 말씀을 제대로 강해하고 있는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말씀으로, 말씀대로, 말씀이 바르게 가르쳐지는 교회입니다.   두 번째로 성례가 바르게 실시되고 있는가입니다. 성례는 세례와 성찬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꼭 지켜 행하라고 명령하신 예식이 뭐라고 했죠? 세례와 성찬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예수님이...
onwoori 2024.03.31 추천 0 조회 8
우리는 분단 80년의 시간 속에 통일을 노래했습니다. 독일은 분단 40년 만에 통일이 되었습니다. 분단의 시간만큼 통일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서독과 동독 사이에서 ‘장벽’이 존재하고 있다고 합니다. 쉽게 극복되지 않는 것이 마음의 장벽, 머리 속의 장벽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해결이 될까요? 교회적으로 봅시다. 우리 교회는 정말 하나 된 교회입니까? 우리 교회는 서로에게 마음이 열려 있는 교회입니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 대부분 갖고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공동체와 맞지 않는 사람들을 스스로 규정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오면 밀어냅니다. 새로운 사람들이 오면 의심합니다. 하나님은 하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 마음을 그 방법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은 기원전 930년경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나누어집니다. 서로 갈등을 계속하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0년 경에 200여년의 왕권을 유지하다가 멸망합니다. 또한 남유다는 기원전 586년경까지 150년경을 더 유지하다가 무너지게 됩니다. 북이스라엘에 대한 남유다 사람들의 생각은 100여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계속 부정적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에스겔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의 인물입니다. 북이스라엘 멸망 후 100년이 지난 뒤의 남유다 선지자입니다. 그는 3장 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렘 3:6) 요시야 왕 때에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배역한 이스라엘이 행한 바를 보았느냐 그가 모든 높은 산에 오르며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서 행음하였도다. 유다 선지자였던 예레미야는 북이스라엘을 배역한 집단이라고 말합니다. 갈등의 시간이 30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그 3시간이 서로를 향한 마음을 누그러트리기는커녕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onwoori 2024.03.24 추천 0 조회 11
성도의 본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싫어하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기를 싫어하고 귀찮아하면 어떻게 됩니까. 목사님한테 혼나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저를 응원하는 본문입니다. 함께 말씀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고대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으로, 요시야 왕의 셋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여러 번 그를 경고했으나 시드기야는 자기의 뜻대로 행하였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시드기야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그에게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게 했지만 시드기야는 배반하고 목을 굳게 하며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시드기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며 왕위에 앉아 있는 기간 동안 백성들은 어떠했습니까?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 공동체 안에서 사랑이 없으면 밖에서 사랑이 없습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있는 이웃부터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습니다. 영적 지도자가 건강해야 교회가 건강해집니다. 시드기야가 영적으로 타락했으니 그의 백성들이 타락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악한 영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교회 지도자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목사님들, 선생님들을 존경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자녀들이 영적으로 교회를 떠나있어도, 목사나 선생님이 전화해서 교회 나와서 예배드리자. 라는 말이 먹힙니다. 그런데 집에서 영적 지도자의 권위를 세워주지 않으면, 결국 그 아이들이 교회 밖에 떠나있을 때엔 먹히지 않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을 위해서 계속 기도하셔야 합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의 영적 권위는 어디에서부터 나옵니까? 말씀에서부터 나옵니다. 말씀대로 사는 영적인 지도자들에게서는 영적 권위가...
onwoori 2024.03.17 추천 0 조회 11
어떻게 하는 것이 성찬식을 준비하는 좋은 방법일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거룩하고 정결한 성찬 예식을 준비하는 합당한 방법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하여 바벨론이 쳐들어와 예루살렘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이고 몽땅 포로로 잡아가겠다 말씀하십니다. 그 예언의 선포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미래에 대한 절망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의 절망에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뻐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보라! 하시며, 축복의 날이 올 것이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남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남편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습니다. 부부가 된다는 것은 쌍방 간의 신뢰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신뢰를 바탕으로 결혼하며, 신뢰가 무너지지 않도록 서로 주의해야 합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어떤 결혼 약속을 하였고, 어떻게 신뢰를 지켜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정의와 공의를 행하라, 탈취 당한 자, 이방인, 고아와 과 부를 도우라.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마라라는 겁니다. 쉽게 말하여 핵심은 정의와 공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행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하나님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언약을 세우시고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문화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따르지 아니하면 신뢰가 지켜지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참 감사한 것은 우리는 언약을 깨뜨린 자들이지만,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맺은 언약을 잊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이 새 언약은 이혼하고 새로운 대상과 재혼하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완전히 무너져버린 것 같은 우리들과 하나님 사이의 약속을 완전히 새롭게...
onwoori 2024.03.10 추천 0 조회 12
요즘 시대는 정말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20세기와 21세기를 생각해보면, 날이갈수록 시대가 빠르게 변하는 것이 어떻게 적응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되고 있습니다. 생활의 방식도 달라지고, 생각도 달라지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어떻습니까. 내 신앙은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변화가 무엇인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1절에 예레미야가 어떤 사람이라고 나옵니까?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이라고 나옵니다. 예레미야는 레위 지파 사람이기는 하지만 당시에 반역자의 무리, 쫓겨난 무리 중 하나로 낙인이 찍혀 있는 상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겁니다. 그런 예레미야를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건이 오늘의 사건입니다. 2절에 보면, 언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까? 요시야가 다스린지 13년에.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학자들은 이 때가 주전 627년경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주전 622년, 요시야가 어떤 일을 했냐면, 열왕기하 22장에 나타난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즉, 예레미야가 소명을 받고 나서 5년뒤에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단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을 단행했다는 것은 어떤 말이냐. 소명 받고 사역을 시작한지 5년 째가 되었음에도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소명받아 소명자로 세워진 예레미야였지만, 그 소명을 감당해 가면서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회개와 각성은 쉽지 않았다는 겁니다. 더 큰 문제가 무엇이냐. 예레미야가 다섯 왕의 통치기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약 40년간 예루살렘과 유다에 관하여 예언을 했는데, 마지막 예언까지 예레미야는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말씀으로 계속 외쳤습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도, 소명받은 선지자 예레미야의 선포도, 이스라엘을 향하여 계속되었지만 여전히 이스라엘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onwoori 2024.03.03 추천 0 조회 17
인생은 고통과 고난의 연속입니다. 그것은 성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과 고난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우리 앞에 거대한 장벽, 상상할 수 없는 문제가 닥쳤을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러한 상황 속에 고통받고 있는 언약 백성에게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상황은 어떤 상황입니까? 메뚜기 떼가 먹을 것들을 다 먹어 치웠고, 단 포도주가 입에서 끊어졌으며(축제가 사라짐), 다른 민족이 침범하였고,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하얗게 되었다(열매가 없음), 애곡함이 가득하며, 여호와의 성전에서 제사가 사라지고,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말라 땅의 소산이 없는 상태, 즐거움이 말라버린 상태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스라엘의 상황은 비통하고 비참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상황은 언제나 찾아옵니다. 성도님들을 심방하다 보면 많은 인생의 스토리들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고통 속에 있으면 고통이 계속 찾아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합니까. 요엘은 이스라엘의 비통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라고 말합니까? 13-14절을 통해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라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엘은 알았던 겁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응답하실 것을 알았던 겁니다. 요엘은 비관적인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비통함 속에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엘의 이름의 뜻이 바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어디에서는 여호와로, 어디에서는 하나님으로, 어디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언급을 다르게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여호와는 어떻게 다를까요? 하나님을 가리키는 기본 칭호가 있습니다. 하나는 엘로힘입니다. 엘로힘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라 번역됩니다....
onwoori 2024.02.22 추천 0 조회 16
요나의 삶은 회복될 가능성이 없어보였습니다. 불순종으로 인하여 어쩌면 하나님에 의한 벌, 스스로 파멸의 자리인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가게 된 시간. 과연 그의 인생이 회복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이 던져집니다. 요나의 인생도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요나의 인생도 회복될 수 있지만, 우리의 인생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장에서 어느날 경험했던 갑작스러운 무너짐. 후퇴, 그리고 우리가 받았던 상처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생은 다시 회복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회복을 경험할 수 있을까. 오늘 본문이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인 3장 1~2절은 1장 1~2절의 말씀과 굉장히 유사합니다. 두 번째라는 단어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만 말씀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불순종한 요나를 버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침묵해 버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요나에게 다시 한번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시한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처음의 모습, 원형을 다시 한번 그에게 반복하여 주셨습니다. 욥기 33장 1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은 관심이 없도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잊어버리고 관심이 없어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순종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디고, 잊고 살아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인내하시고 용납하시고 다시 말씀하여 주시며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느웨로 갑니다. 그렇습니다. 드디어 그는 순종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자기의 뜻은 니느웨에 없었지만, 하나님의 뜻이 니느웨였기에, 하나님의 뜻을 나의 뜻으로 삼기로...
onwoori 2024.02.22 추천 0 조회 10
오늘 본문을 통하여서 영적으로 음란한 이스라엘,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린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14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14절에 어떤 단어가 나타나죠? “그러므로”라는 단어가 나타납니다. 이 단어가 왜 이 자리에 있게 되었을까요? 2장 1-13절까지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소제목에 딱 나와있죠? 음란을 제거할지라. 바로 하나님 백성들의 죄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13절에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그에게 벌을 주리라” 벌을 주겠다고 말한 뒤에, 그러므로 라고 나오는거예요.   보통 벌을 주리라. 그러므로. 내가 이런 벌을 내리겠다. 이게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 14절 위에 있는 소제목을 볼까요? 소제목이 뭐예요? 백성을 향한 여호와의 사랑. 자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겁니다. 죄인에게 벌을 내리시는데, 그 벌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벌이예요.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 음란을 행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겼어요. 벌을 내리겠다.   14절에,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겠다. 위로하겠다고 하세요. 이게 무슨 벌입니까. 15절에, 포도원을 그에게 준다고 합니다.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겠다 말합니다. 이게 벌입니까? 축복이죠. 하나님이 복 주시는 것입니다. 게다가 16절에 뭐라 말합니까.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나를 신부로 삼아주시겠다. 가족으로 삼아주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7절에 네가 바알의 이름을 부르지 않도록, 그를 기억하지 못하게 하겠다. 이 말이 무슨말이냐면, 나를 신부로 삼아주셔서, 다시는 바알에게 가지 않도록,...
onwoori 2024.02.12 추천 0 조회 24
오늘 말씀은 무력감과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무엇인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히스기야는 당시의 대국 앗수르 왕의 사자에게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의 내용은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9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요약해볼 수 있습니다. ‘나랑 맞선 민족들은 다 진멸했다. 너도 항복하지 않으면 똑같이 될 것이다’ 그 앗수르 왕의 편지처럼 당시 앗수르에게 대항했던 모든 민족은 멸망당했습니다. 이제 그 차례가 자신에게 온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위기의 순간 히스기야의 선택은 무엇이었는지 1절 말씀을 살펴봅시다. (1)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서 히스기야가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히스기야는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놓았습니다.   어려움을 만나면 그 사람이 정말로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사람의 신앙이 어떠한지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히스기야는 어려움 앞에서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갔습니다. 언약대심방을 다니다보면 성도님들의 많은 기도응답에 대한 간증들을 듣게 됩니다. 그 간증들의 공통점은 ‘문제의 상황에서 기도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큰 기적을 경험해도 ‘기도하지 않으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기적이라’ 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위기는 기회이다’라고 표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히스기야가 받았던 이 협박 편지는 그가 하나님께 더 나아가 하나님을 더 깊게 만날 기회였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문제를 만날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지금 문제가 없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러면 안되지만 문제가 발생할 때,...
onwoori 2024.02.12 추천 0 조회 10
여러분은 왜 예배하십니까? 교회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공예배’입니다. 찬양도 혼자할 수 있고, 말씀 묵상도 혼자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공예배(공동체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믿음의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공예배를 드리십니까?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공예배는 ‘목자의 음성을 듣는 자리’입니다. 오늘 양 된 우리에게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귀를 기울여봅시다.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1절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팔’은 ‘힘, 능력, 도움’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오늘 이사야 53장을 보니 ‘여호와의 힘, 여호와의 능력, 그리고 여호와의 도움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이 질문의 답은 ‘이스라엘’입니다. 여호와의 도움이 누구에게 나타났는가? 그 답은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전쟁 중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팔로 이스라엘을 보호하셨습니다. 인생의 올무에 빠진 요셉에게도 함께하셨고, 갈대 상자에 담겨 물길에 떠내려가는 모세에게도 함께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하나님께서는 함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 자신의 자녀, 그리고 자신의 양을 향하여 팔을 펼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믿으시나요? 하나님의 자녀됨을 믿으시나요? 목자되신 주님의 양임을 믿으시나요? 그렇다면,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귀한 사실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하루, 삶의 어려움과 힘듦 속에서 ‘자녀된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2~5절에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6절에서 이렇게...
onwoori 2024.02.10 추천 0 조회 12
오늘 본문인 이사야 6장은 별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사야에게 내려진 소명장’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6장에는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만나주시고, 그에게 소명을 주신 내용이 담겨져있습니다. 오늘 이사야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주신 소명’을 회복하는 귀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난 그때를 오늘 본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여러분은 예수님을 언제 만나셨습니까? 이단인 구원파는 만날 때 ‘언제 구원받았는지’에 대해 질문한다고 합니다. (언제 어디서 몇시에 구원 받으셨습니까?) 그들이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는 ‘구원파 교회에 나오는 날, 신앙 교육받은 날이 구원받은 날’이라는 억지를 부리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성경적이지 못한 접근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만난 경험,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경험한 때’를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무엇이 있습니까? 이사야의 인생을 바꾼 날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바꾼 경험의 날은 언제입니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날 향한 주님의 소명을 알게 되고, 구원하심에 대한 감격의 눈물을 흘린 날은 언제입니까? 저는 오늘이 그날이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매 주일(매 예배의 순간)이 하나님을 만나며 소명을 점검하는 귀한 주일이 되길 원합니다. 오늘 이 시간이, 그리고 매 예배의 순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기적의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예배의 시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시간이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6-7)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onwoori 2024.02.10 추천 0 조회 7
오늘 본문의 나아만 장군은 신뢰함으로 병고침을 받았습니다. 먼저 ‘(사마리아의 선지자들 만나보라는) 작은 포로 소녀의 말을 신뢰함’으로, 그리고 ‘(더러워보이는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엘리사의 말을 신뢰함’으로 병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방금 읽은 14절의 말씀에 그의 신뢰함과 순종함의 결과가 담겨있습니다.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신뢰함으로 병고침을 받은 나아만과 반대로 오해했던 이스라엘 왕은 머리를 잡으며 고민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입니다. 적혀진 내용 그대로의 편지를 신뢰하지 못했던 결과였습니다. 신뢰하였던 나아만 장군과 오해하였던 이스라엘 왕의 극명한 차이를 우리는 열왕기하 5장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아만과 같은 신뢰의 길을 선택하시겠는가? 아니면 이스라엘 왕과 같은 오해의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오늘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까?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누가복음 4장 2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 4: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수많은 나병환자가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병고침의 구원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반대로 이방사람으로, 손가락질했던 그 아람사람 나아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신뢰하였고, 순종하여서’ 병고침의 구원을 경험합니다.  ...
onwoori 2024.01.16 추천 0 조회 10
본문의 사건 이전에 어떤 사건이 있었습니까? 지난주 엘리야가 선지자들과 영적인 전투를 하러 나아가죠.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리라 그렇게 결단하며 나아갑니다. 엘리야가 선지자들과 영적인 전투 끝에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주시는 사건으로 18장이 마무리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절에서 아합이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행한 일과 바알의 선지자를 죽인 이야기를 그의 아내 이세벨에게 전합니다. 왜 아합이 이세벨에게 이런 것을 보고하듯이 말했을까요? 이세벨은 시돈 왕 엣바알의 딸입니다. 엣바알의 뜻은 바알과 함께한 자 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즉, 이세벨의 집안 자체가 바알에 헌신적인 가족입니다. 아합이 이세벨과 결혼을 한 것도 문제인데, 지금 아합이 바알의 여인에게 완전히 빠져서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이세벨이 직접적으로 엘리야를 죽이고자 선포를 합니다. 엘리야는 이 소식을 듣고 3절에, 자기의 생명을 위하여 도망합니다. 그리고 도망친 곳이 브엘세바입니다. 그는 살려고 도망하여 유다 지역 최남단인 브엘세바로 갑니다. 여기에 나타난 엘리야의 도망은 이야기의 국면을 완전히 전환시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엘리야가 보여준 모습이 무엇입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선지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엘리야는 살려고, 자신의 목숨을 위하여 도망을 칩니다. 겁쟁이의 모습으로 완전하게 바뀝니다. 다른사람 같기도 합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요? 왜 갑자기 겁쟁이와...
onwoori 2024.01.16 추천 0 조회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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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요약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는 내용으로 가득 찬 책이 바로 학개서입니다. 분명하게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학개에게 언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까? 다리오 왕 제 2년입니다. 스가랴와 비슷한 시기죠. 왜 하나님이 비슷한 시기에 두 명의 선지자에게 임하셨을까요? 저는 이야말로 하나님의 정확한 뜻을 전하시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학개에게만 임했다면, 혹은 스가랴에게만 임했다면, 만약 그랬다면 제가 당시 사람이라면 믿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추측은 학개와 스가랴에게 동시에 같은 말씀을 주심으로써 참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 공사를 재개하는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셨다 싶습니다.   학개를 통해 당시의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주십니까? 4절입니다 당시에 집은 흙으로 지었습니다. 판벽은 나무판으로 벽을 삼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더 비싸고 좋은 집을 의미합니다. 솔로몬 시대에 지었던 성전은 황폐화가 되었고, 재건되지 못한 채 16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포로기 사람들은 페르시아 왕국에, 그리고 돌아온 사람들도 고향에 잘 안착한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집과 백성들의 집을 비교하시며, 이들의 잘못을 깨우치고 계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성전과 같은 건물에 머무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왜 하나님은 건물을 비교하십니까?   하나님은 건물에 갇히시는 분이 아니신데, 사람은 건물에 시선이 갇힙니다. 그래서 인간의 시선에 맞추어 그분의 뜻을 밝히시고자 성전과 그들의 집을 대조하십니다.   진정한 뜻은 성전의 유무가 아니라 백성들의 중심입니다. 이 비유를 하시면서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 예배함에 있는지 아니면 자신의 안위와 안락함에 있는지를...
onwoori 09:05 추천 0 조회 1
우리는 역사 속 지금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삶의 하루 하루가 모여 시대의 역사가 됩니다. 인생 속에서의 선택이 역사가 됩니다. 우리가 만난 한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기회와 무지 속에서 만남과 사건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본문의 시작에서는 히브리어로 ‘그리고’를 의미하는 ‘와우’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그리고’라는 것은 에스라 앞에 어떤 책과 연결해서 썼다는 것이죠. 어떤 쪽으로 묶였던지 에스라는 분명 포로 이전의, 이후의 언약 공동체의 역사를 이 이야기를 통해 연결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게 역사의 사건 사건이 연결되어진 상황 속에서 고레스가 갑자기 조서를 내립니다. 고레스가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며 유다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라 하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라 이야기합니다.   고레스는 바사 왕국의 왕입니다. 그런데 일개 정복당한 민족의 신을 신앙고백을 하며 섬긴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가 있을까요?   여러분들 옆에 있는 이 사람이 갑자기 하나님께서 마음 부어주시고 은혜 주셔서 어떤 일을 일으킬지 모르는 겁니다. 역사 속의 한 사람으로 나와 내 옆에 있는 귀한 영혼과 우리 공동체가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고레스가 성전 기물로 삼고자 꺼낸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원래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용되었던 성전 그릇을 꺼내줍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유물들이 외국에 있습니다. 전리품은 자국의 힘을 상징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용되던 성전 그릇은 전리품입니다. 그것을 예루살렘...
onwoori 2024.05.12 추천 0 조회 4
경수초등학교가 마지막 어린이날을 맞이하였다고 합니다. 내년 3월에는 경일초등학교와 통폐합이 됩니다. 어린이날이 학교에서만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학교가 사라집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어떻게 이 문제를 대처해야 할까요.   주일학교마다 어린이를 위한 행사를 잘 준비하였습니다. 어린이라는 시절은 금새 왔다가 스쳐 지나가죠.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린이주일 행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어린이를 위하여 한번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주 사랑으로 안아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행사는 아이들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사랑의 표현이 아이들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어린이들을 보시면 꼭 안아주시면서 너는 우리 교회의 미래란다 축복한다고 말씀하기 바랍니다.   본격적으로 스가랴서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장세훈 박사에 따르면, 스가랴서 전체의 요약분이 바로 오늘 본문 1장 1-6절이라고 합니다. 이 부분만 알아도 스가랴서 전체의 이야기를 알 수 있습니다.   1절에 다리오왕이 즉위한 지 2년 째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이자 베레갸의 아들인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였다고 나옵니다.   스가랴에게 따라다니던 말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잇도의 손자 스가랴 라는 말입니다. 잇도라는 사람이 당시 선지자들이나 믿음의 사람들에게 굉장히 존경받는 사람이었던 겁니다. 족보를 왜 탐독하며 연구했느냐. 어린이주일. 우리가 다시 한번 강조하고 또 기억해야 하는 것은, 믿음의 명문 가문을 이루어야 하는 존재가 이 자리에 있는 우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 우리 주일학교 아이들 가운데 스가랴와 같은 사람들이 나오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열심을 내는 것도 기억하시지만,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도 반드시...
onwoori 2024.05.05 추천 0 조회 3
최근 제가 와우리교회 부설 우리기독학교의 교장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교육을 하실 때에 학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다니엘과 같은 아이들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시더라구요.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세상 속에서 믿음을 지켜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교육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니엘과 같은 믿음.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믿음입니다. 본문과는 관련이 없지만 기독교 교육에 관하여 조금 더 마음을 나누고자 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사회화에 대해서 가장 중요한 기관이 어디입니까? 원래는 가정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가정이 아니라 공교육입니다. 공교육은 돈을 내지 않습니다. 국가에서도 다음 세대에는 끊임없이 투자합니다. 그렇게 공교육을 거쳐 가며 한 아이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필요한 지식과 관계를 쌓아갑니다.   우리가 다니엘과 같은 믿음을 가진 하나님 나라의 국민을 세우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다음 세대에 투자해야 합니다. 교육은 백년대계라 했습니다.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지만, 끊임없이 길러내야 다니엘과 같은 믿음을 가진 하나님 나라 백성이 나오는 겁니다.   저랑 여러 가지 신앙의 문제를 놓고 대화를 나누는 기독교교육 교수님이 계십니다. 그 교수님이 1/140을 말씀하시더라구요.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장년이 되었을 때에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확률이라고 합니다. 제가 고등학생 시절, 제 아내와 저는 같은 교회 같은 고등부였습니다. 그때 고등부가 약 160명 정도 되었어요. 그런데 지금 교회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10명도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문제 제기를 해야 합니다. 여러 교회를 다니고 섬기고, 분석하면서 특징이 있었습니다. 다음 세대가...
onwoori 2024.04.28 추천 0 조회 5
오늘 본문에 벨사살 왕이 나옵니다. 기록에 따르면 벨사살은 왕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왕은 나보니두스였습니다. 왜 왕이라고 부르냐면, 나보니두스 왕은 통치기간의 대부분은 아라비아 지역에서 보냈고 벨사살을 바벨론의 섭정으로 세웠습니다. 실질적인 왕의 역할을 했던 사람이 벨사살이었습니다.   벨사살은 귀족 천명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천명 앞에서 술을 마셨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그의 귀족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벨사살에게 동조하는 가신들의 모임입니다. 쾌락에 사로잡힌 시간이었을 것이고, 이성이 마비된 상태였을 겁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벨사살 왕이 잔치를 베풀 때에 사용한 그릇들은 어느 나라에서 탈취한 것들이었습니까? 2절에 보면, 벨사살은 아버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하여 온 금, 은, 그릇이었습니다. 성전에서 탈취해 온 성전 기물로 왕과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게 하려 하였다는 것은 의도가 있는 행동입니다. 성전 기물은 신에게 드리는 것들이 담기는 그릇과 잔입니다.   성전 기물로 담긴 음식으로 내 부하들이 먹는다면, 내 부하들이 신급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부하들이 벨사살에게 충성을 다합니다. 즉 벨사살의 의도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욕할 의도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은 의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악인들의 그 마음,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벨사살의 행동, 마음, 다 알고 계십니다.   5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여기에서 보면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났다고 나옵니다. 지금 이 손가락들이 나타났던 상황은 우상을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었다며 찬양하고...
onwoori 2024.04.20 추천 0 조회 5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이라는 이 주제는 다니엘서 3장 전체에서 핵심적인 문장입니다. 구약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아마도 이 신상은 바빌로니아 제국, 바빌로니아 정신을 형성화하여 황제 느부갓네살을 본 따 만든 신상이었을 것입니다. 이 신상에 절한다는 것은 바빌로니아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것이죠.   국가의 신성한 이데올로기를 채택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정치적 통일성을 만들어 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신들에 대한 예배를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바빌로니아의 국가 신들을 우선시한다면 이라는 전제조건을 달아 놓았습니다. 그렇게 느부갓네살 왕은 공식적 국가 종교 정책에 합당한 신상을 만들고 축제를 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나아와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유다인들은 그들의 축제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본 갈대아인들은 그 지역 사람들입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저들만 절하지 않았다. 축제에 참여하지 않았다며 그들을 참소, 고발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닥친 예상하지 못한 위기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 1부에 나누었지만, 왕의 식탁에서 내려오는 고기와 관련하여 이미 이런 위기상황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때에 그들은 바빌로니아의 전적인 충성 정책에 대하여 양심적이고 종교적인 반대를 선언했습니다. 그들은 일정한 수준의 종교적 자유를 누렸으며, 황제도 그것에 대한 어떤 위협이나 징계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13절에,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오라 말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라고 나옵니다. 느부갓네살은 이들을 많이 아꼈던 것 같습니다. 14절에, 이것이 사실이냐 묻습니다. 그리고 15절에, 이제라도 절하라고 말합니다. 절하지 않으면...
onwoori 2024.04.14 추천 0 조회 7
요즘 저의 아들이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왕할머니 어디가셨어? 응 왕할머니는 하나님이 부르셔서 하늘 놀이터에서 놀고 계셔. 하늘 놀이터 하율이는 가고 싶어? 아니 가면 엄마 아빠 못보잖아. 그게 죽는 거야? 응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부르시면 죽어서 하늘 놀이터에 가게 돼. 아빠도 엄마도 죽어? 당연하지 그래서 하나님 잘 믿어야 나중에 하늘 놀이터 가는 거야.   이 대화 끝에 하율이가 요즘 교회를 더 잘 나옵니다. 전에는 하나님 집에서 아빠가 일하느라 집 안 온다고 하나님이 아빠를 뺏어간다고 그러더니 요즘에는 하나님 집에 자주 가서 하나님하고 친해져야 한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 이런 거구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를 가르쳐주셨던 한 철학 전공 교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오늘을 살아가면서 의미를 찾는다.”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면 오늘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려 합니다.   나이가 어리든 많든 인간이라면, 죽음을 앞에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영생을 생각할 수 있고, 선물로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 뒤에 부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죽음과 생명은 함께 가는 신앙의 신비인 듯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니엘에게 닥친 상황은 어떤 상황입니까. 가히 죽음의 상황이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주전 605년에 느부갓네살은 이집트 원정 중에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성전 보물들을 취하고 유다의 몇몇 귀족들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갑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잡혀간 망한...
onwoori 2024.04.07 추천 0 조회 3
오늘 본문은 지난 성찬식 본문과 동일합니다. 성찬식 때에 다른 본문으로 설교하고 성찬 본문을 설교하는 것보다 성찬식 때마다 성찬식 본문으로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성찬의 의미를 강화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매년 같은 본문으로 성찬의 의미를 강조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 도리를 말씀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균형 잡힌 분이십니다. 자유로운 것 같고, 규례와 절차를 지키기 원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이는 예수님께서도 꼭 지켜 행하라고 명령하신 예식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세례이고, 다른 한 가지는 성찬입니다.   세례는 마태복음 28장 19절에 말씀하셨죠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그리고 성찬은 오늘 본문 19절에,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두 번 정확하게 명령하시며 예식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참된 교회의 세 가지 구별 기준은 무엇일까요? 참된 교회는 쉽게 말하면 내가 원하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겠죠.   신학적으로 참된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 하면, 첫 번째로 말씀이 바르게 설교되고 있는가입니다. 쉽게 말하면 성경 말씀을 제대로 강해하고 있는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말씀으로, 말씀대로, 말씀이 바르게 가르쳐지는 교회입니다.   두 번째로 성례가 바르게 실시되고 있는가입니다. 성례는 세례와 성찬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꼭 지켜 행하라고 명령하신 예식이 뭐라고 했죠? 세례와 성찬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예수님이...
onwoori 2024.03.31 추천 0 조회 8
우리는 분단 80년의 시간 속에 통일을 노래했습니다. 독일은 분단 40년 만에 통일이 되었습니다. 분단의 시간만큼 통일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서독과 동독 사이에서 ‘장벽’이 존재하고 있다고 합니다. 쉽게 극복되지 않는 것이 마음의 장벽, 머리 속의 장벽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해결이 될까요? 교회적으로 봅시다. 우리 교회는 정말 하나 된 교회입니까? 우리 교회는 서로에게 마음이 열려 있는 교회입니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 대부분 갖고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공동체와 맞지 않는 사람들을 스스로 규정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오면 밀어냅니다. 새로운 사람들이 오면 의심합니다. 하나님은 하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 마음을 그 방법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은 기원전 930년경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나누어집니다. 서로 갈등을 계속하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0년 경에 200여년의 왕권을 유지하다가 멸망합니다. 또한 남유다는 기원전 586년경까지 150년경을 더 유지하다가 무너지게 됩니다. 북이스라엘에 대한 남유다 사람들의 생각은 100여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계속 부정적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에스겔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의 인물입니다. 북이스라엘 멸망 후 100년이 지난 뒤의 남유다 선지자입니다. 그는 3장 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렘 3:6) 요시야 왕 때에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배역한 이스라엘이 행한 바를 보았느냐 그가 모든 높은 산에 오르며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서 행음하였도다. 유다 선지자였던 예레미야는 북이스라엘을 배역한 집단이라고 말합니다. 갈등의 시간이 30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그 3시간이 서로를 향한 마음을 누그러트리기는커녕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onwoori 2024.03.24 추천 0 조회 11
성도의 본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싫어하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기를 싫어하고 귀찮아하면 어떻게 됩니까. 목사님한테 혼나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저를 응원하는 본문입니다. 함께 말씀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고대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으로, 요시야 왕의 셋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여러 번 그를 경고했으나 시드기야는 자기의 뜻대로 행하였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시드기야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그에게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게 했지만 시드기야는 배반하고 목을 굳게 하며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시드기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며 왕위에 앉아 있는 기간 동안 백성들은 어떠했습니까?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 공동체 안에서 사랑이 없으면 밖에서 사랑이 없습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있는 이웃부터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습니다. 영적 지도자가 건강해야 교회가 건강해집니다. 시드기야가 영적으로 타락했으니 그의 백성들이 타락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악한 영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교회 지도자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목사님들, 선생님들을 존경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자녀들이 영적으로 교회를 떠나있어도, 목사나 선생님이 전화해서 교회 나와서 예배드리자. 라는 말이 먹힙니다. 그런데 집에서 영적 지도자의 권위를 세워주지 않으면, 결국 그 아이들이 교회 밖에 떠나있을 때엔 먹히지 않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을 위해서 계속 기도하셔야 합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의 영적 권위는 어디에서부터 나옵니까? 말씀에서부터 나옵니다. 말씀대로 사는 영적인 지도자들에게서는 영적 권위가...
onwoori 2024.03.17 추천 0 조회 11
어떻게 하는 것이 성찬식을 준비하는 좋은 방법일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거룩하고 정결한 성찬 예식을 준비하는 합당한 방법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하여 바벨론이 쳐들어와 예루살렘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이고 몽땅 포로로 잡아가겠다 말씀하십니다. 그 예언의 선포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미래에 대한 절망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의 절망에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뻐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보라! 하시며, 축복의 날이 올 것이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남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남편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습니다. 부부가 된다는 것은 쌍방 간의 신뢰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신뢰를 바탕으로 결혼하며, 신뢰가 무너지지 않도록 서로 주의해야 합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어떤 결혼 약속을 하였고, 어떻게 신뢰를 지켜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정의와 공의를 행하라, 탈취 당한 자, 이방인, 고아와 과 부를 도우라.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마라라는 겁니다. 쉽게 말하여 핵심은 정의와 공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행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하나님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언약을 세우시고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문화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따르지 아니하면 신뢰가 지켜지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참 감사한 것은 우리는 언약을 깨뜨린 자들이지만,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맺은 언약을 잊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이 새 언약은 이혼하고 새로운 대상과 재혼하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완전히 무너져버린 것 같은 우리들과 하나님 사이의 약속을 완전히 새롭게...
onwoori 2024.03.10 추천 0 조회 12
요즘 시대는 정말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20세기와 21세기를 생각해보면, 날이갈수록 시대가 빠르게 변하는 것이 어떻게 적응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되고 있습니다. 생활의 방식도 달라지고, 생각도 달라지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어떻습니까. 내 신앙은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변화가 무엇인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1절에 예레미야가 어떤 사람이라고 나옵니까?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이라고 나옵니다. 예레미야는 레위 지파 사람이기는 하지만 당시에 반역자의 무리, 쫓겨난 무리 중 하나로 낙인이 찍혀 있는 상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겁니다. 그런 예레미야를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건이 오늘의 사건입니다. 2절에 보면, 언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까? 요시야가 다스린지 13년에.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학자들은 이 때가 주전 627년경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주전 622년, 요시야가 어떤 일을 했냐면, 열왕기하 22장에 나타난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즉, 예레미야가 소명을 받고 나서 5년뒤에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단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을 단행했다는 것은 어떤 말이냐. 소명 받고 사역을 시작한지 5년 째가 되었음에도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소명받아 소명자로 세워진 예레미야였지만, 그 소명을 감당해 가면서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회개와 각성은 쉽지 않았다는 겁니다. 더 큰 문제가 무엇이냐. 예레미야가 다섯 왕의 통치기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약 40년간 예루살렘과 유다에 관하여 예언을 했는데, 마지막 예언까지 예레미야는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말씀으로 계속 외쳤습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도, 소명받은 선지자 예레미야의 선포도, 이스라엘을 향하여 계속되었지만 여전히 이스라엘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onwoori 2024.03.03 추천 0 조회 17
인생은 고통과 고난의 연속입니다. 그것은 성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과 고난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우리 앞에 거대한 장벽, 상상할 수 없는 문제가 닥쳤을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러한 상황 속에 고통받고 있는 언약 백성에게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상황은 어떤 상황입니까? 메뚜기 떼가 먹을 것들을 다 먹어 치웠고, 단 포도주가 입에서 끊어졌으며(축제가 사라짐), 다른 민족이 침범하였고,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하얗게 되었다(열매가 없음), 애곡함이 가득하며, 여호와의 성전에서 제사가 사라지고,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말라 땅의 소산이 없는 상태, 즐거움이 말라버린 상태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스라엘의 상황은 비통하고 비참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상황은 언제나 찾아옵니다. 성도님들을 심방하다 보면 많은 인생의 스토리들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고통 속에 있으면 고통이 계속 찾아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합니까. 요엘은 이스라엘의 비통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라고 말합니까? 13-14절을 통해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라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엘은 알았던 겁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응답하실 것을 알았던 겁니다. 요엘은 비관적인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비통함 속에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엘의 이름의 뜻이 바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어디에서는 여호와로, 어디에서는 하나님으로, 어디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언급을 다르게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여호와는 어떻게 다를까요? 하나님을 가리키는 기본 칭호가 있습니다. 하나는 엘로힘입니다. 엘로힘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라 번역됩니다....
onwoori 2024.02.22 추천 0 조회 16
요나의 삶은 회복될 가능성이 없어보였습니다. 불순종으로 인하여 어쩌면 하나님에 의한 벌, 스스로 파멸의 자리인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가게 된 시간. 과연 그의 인생이 회복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이 던져집니다. 요나의 인생도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요나의 인생도 회복될 수 있지만, 우리의 인생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장에서 어느날 경험했던 갑작스러운 무너짐. 후퇴, 그리고 우리가 받았던 상처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생은 다시 회복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회복을 경험할 수 있을까. 오늘 본문이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인 3장 1~2절은 1장 1~2절의 말씀과 굉장히 유사합니다. 두 번째라는 단어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만 말씀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불순종한 요나를 버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침묵해 버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요나에게 다시 한번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시한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처음의 모습, 원형을 다시 한번 그에게 반복하여 주셨습니다. 욥기 33장 1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은 관심이 없도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잊어버리고 관심이 없어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순종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디고, 잊고 살아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인내하시고 용납하시고 다시 말씀하여 주시며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느웨로 갑니다. 그렇습니다. 드디어 그는 순종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자기의 뜻은 니느웨에 없었지만, 하나님의 뜻이 니느웨였기에, 하나님의 뜻을 나의 뜻으로 삼기로...
onwoori 2024.02.22 추천 0 조회 10
오늘 본문을 통하여서 영적으로 음란한 이스라엘,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린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14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14절에 어떤 단어가 나타나죠? “그러므로”라는 단어가 나타납니다. 이 단어가 왜 이 자리에 있게 되었을까요? 2장 1-13절까지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소제목에 딱 나와있죠? 음란을 제거할지라. 바로 하나님 백성들의 죄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13절에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그에게 벌을 주리라” 벌을 주겠다고 말한 뒤에, 그러므로 라고 나오는거예요.   보통 벌을 주리라. 그러므로. 내가 이런 벌을 내리겠다. 이게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 14절 위에 있는 소제목을 볼까요? 소제목이 뭐예요? 백성을 향한 여호와의 사랑. 자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겁니다. 죄인에게 벌을 내리시는데, 그 벌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벌이예요.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 음란을 행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겼어요. 벌을 내리겠다.   14절에,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겠다. 위로하겠다고 하세요. 이게 무슨 벌입니까. 15절에, 포도원을 그에게 준다고 합니다.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겠다 말합니다. 이게 벌입니까? 축복이죠. 하나님이 복 주시는 것입니다. 게다가 16절에 뭐라 말합니까.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나를 신부로 삼아주시겠다. 가족으로 삼아주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7절에 네가 바알의 이름을 부르지 않도록, 그를 기억하지 못하게 하겠다. 이 말이 무슨말이냐면, 나를 신부로 삼아주셔서, 다시는 바알에게 가지 않도록,...
onwoori 2024.02.12 추천 0 조회 24
오늘 말씀은 무력감과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무엇인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히스기야는 당시의 대국 앗수르 왕의 사자에게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의 내용은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9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요약해볼 수 있습니다. ‘나랑 맞선 민족들은 다 진멸했다. 너도 항복하지 않으면 똑같이 될 것이다’ 그 앗수르 왕의 편지처럼 당시 앗수르에게 대항했던 모든 민족은 멸망당했습니다. 이제 그 차례가 자신에게 온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위기의 순간 히스기야의 선택은 무엇이었는지 1절 말씀을 살펴봅시다. (1)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서 히스기야가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히스기야는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놓았습니다.   어려움을 만나면 그 사람이 정말로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사람의 신앙이 어떠한지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히스기야는 어려움 앞에서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갔습니다. 언약대심방을 다니다보면 성도님들의 많은 기도응답에 대한 간증들을 듣게 됩니다. 그 간증들의 공통점은 ‘문제의 상황에서 기도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큰 기적을 경험해도 ‘기도하지 않으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기적이라’ 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위기는 기회이다’라고 표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히스기야가 받았던 이 협박 편지는 그가 하나님께 더 나아가 하나님을 더 깊게 만날 기회였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문제를 만날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지금 문제가 없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러면 안되지만 문제가 발생할 때,...
onwoori 2024.02.12 추천 0 조회 10
여러분은 왜 예배하십니까? 교회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공예배’입니다. 찬양도 혼자할 수 있고, 말씀 묵상도 혼자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공예배(공동체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믿음의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공예배를 드리십니까?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공예배는 ‘목자의 음성을 듣는 자리’입니다. 오늘 양 된 우리에게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귀를 기울여봅시다.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1절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팔’은 ‘힘, 능력, 도움’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오늘 이사야 53장을 보니 ‘여호와의 힘, 여호와의 능력, 그리고 여호와의 도움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이 질문의 답은 ‘이스라엘’입니다. 여호와의 도움이 누구에게 나타났는가? 그 답은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전쟁 중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팔로 이스라엘을 보호하셨습니다. 인생의 올무에 빠진 요셉에게도 함께하셨고, 갈대 상자에 담겨 물길에 떠내려가는 모세에게도 함께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하나님께서는 함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 자신의 자녀, 그리고 자신의 양을 향하여 팔을 펼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믿으시나요? 하나님의 자녀됨을 믿으시나요? 목자되신 주님의 양임을 믿으시나요? 그렇다면,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귀한 사실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하루, 삶의 어려움과 힘듦 속에서 ‘자녀된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2~5절에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6절에서 이렇게...
onwoori 2024.02.10 추천 0 조회 12
오늘 본문인 이사야 6장은 별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사야에게 내려진 소명장’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6장에는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만나주시고, 그에게 소명을 주신 내용이 담겨져있습니다. 오늘 이사야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주신 소명’을 회복하는 귀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난 그때를 오늘 본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여러분은 예수님을 언제 만나셨습니까? 이단인 구원파는 만날 때 ‘언제 구원받았는지’에 대해 질문한다고 합니다. (언제 어디서 몇시에 구원 받으셨습니까?) 그들이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는 ‘구원파 교회에 나오는 날, 신앙 교육받은 날이 구원받은 날’이라는 억지를 부리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성경적이지 못한 접근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만난 경험,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경험한 때’를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무엇이 있습니까? 이사야의 인생을 바꾼 날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바꾼 경험의 날은 언제입니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날 향한 주님의 소명을 알게 되고, 구원하심에 대한 감격의 눈물을 흘린 날은 언제입니까? 저는 오늘이 그날이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매 주일(매 예배의 순간)이 하나님을 만나며 소명을 점검하는 귀한 주일이 되길 원합니다. 오늘 이 시간이, 그리고 매 예배의 순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기적의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예배의 시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시간이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6-7)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onwoori 2024.02.10 추천 0 조회 7
오늘 본문의 나아만 장군은 신뢰함으로 병고침을 받았습니다. 먼저 ‘(사마리아의 선지자들 만나보라는) 작은 포로 소녀의 말을 신뢰함’으로, 그리고 ‘(더러워보이는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엘리사의 말을 신뢰함’으로 병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방금 읽은 14절의 말씀에 그의 신뢰함과 순종함의 결과가 담겨있습니다.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신뢰함으로 병고침을 받은 나아만과 반대로 오해했던 이스라엘 왕은 머리를 잡으며 고민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입니다. 적혀진 내용 그대로의 편지를 신뢰하지 못했던 결과였습니다. 신뢰하였던 나아만 장군과 오해하였던 이스라엘 왕의 극명한 차이를 우리는 열왕기하 5장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아만과 같은 신뢰의 길을 선택하시겠는가? 아니면 이스라엘 왕과 같은 오해의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오늘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까?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누가복음 4장 2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 4: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수많은 나병환자가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병고침의 구원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반대로 이방사람으로, 손가락질했던 그 아람사람 나아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신뢰하였고, 순종하여서’ 병고침의 구원을 경험합니다.  ...
onwoori 2024.01.16 추천 0 조회 10
본문의 사건 이전에 어떤 사건이 있었습니까? 지난주 엘리야가 선지자들과 영적인 전투를 하러 나아가죠.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리라 그렇게 결단하며 나아갑니다. 엘리야가 선지자들과 영적인 전투 끝에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주시는 사건으로 18장이 마무리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절에서 아합이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행한 일과 바알의 선지자를 죽인 이야기를 그의 아내 이세벨에게 전합니다. 왜 아합이 이세벨에게 이런 것을 보고하듯이 말했을까요? 이세벨은 시돈 왕 엣바알의 딸입니다. 엣바알의 뜻은 바알과 함께한 자 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즉, 이세벨의 집안 자체가 바알에 헌신적인 가족입니다. 아합이 이세벨과 결혼을 한 것도 문제인데, 지금 아합이 바알의 여인에게 완전히 빠져서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이세벨이 직접적으로 엘리야를 죽이고자 선포를 합니다. 엘리야는 이 소식을 듣고 3절에, 자기의 생명을 위하여 도망합니다. 그리고 도망친 곳이 브엘세바입니다. 그는 살려고 도망하여 유다 지역 최남단인 브엘세바로 갑니다. 여기에 나타난 엘리야의 도망은 이야기의 국면을 완전히 전환시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엘리야가 보여준 모습이 무엇입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선지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엘리야는 살려고, 자신의 목숨을 위하여 도망을 칩니다. 겁쟁이의 모습으로 완전하게 바뀝니다. 다른사람 같기도 합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요? 왜 갑자기 겁쟁이와...
onwoori 2024.01.16 추천 0 조회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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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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